왜 롤랑 가로스는 끈기를 요구하는가?
[박만규의 에티모버스’(Etymoverse)']
프랑스 오픈 대회장 '롤랑 가로스'
어디서 딴 이름일까...추구하는 정신은?
‘에티모버스’(Etymoverse)'는 어원을 뜻하는 Etymology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를 필자가 합성한 말이다. 어원에는 옛사람들의 사고가 비유 속에 담겨 있어 세계에 대한 인류의 다양하고 심오한 사유를 알게 해준다. 이는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나달의 투혼, 프랑스 오픈의 정신
2022년 프랑스 오픈 테니스대회가 끝났다. 남자 단식에서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이 우승했는데, 그는 이 대회에서 개인 통산 14회째 우승이라는 새로운 기록은 물론 그랜드 슬램 대회의 22회라는 최다 우승 신기록도 작성했다.
이번 대회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생각할 거리로 던져 준다.
우선은 나달이 보여준 엄청난 투혼이다. 사실 그는 대회 이전부터 부상에 시달렸으며 참가 자체가 불투명했다. 발바닥 관절이 변형되는 희귀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2년 전부터 운동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고 있으며, 이번 대회의 경우 신경주사를 맞으며 통증을 참아내면서 매 경기에 임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 나달이 보여준 끈기와 굴하지 않는 도전의 정신은 대회의 슬로건과도 크게 닮아 있다. 그가 시상대에 선 장면에 함께 포착된 슬로건이 그것이다. 아래 사진을 보라. 결승전이 진행된 필립-샤트리에 코트(Court Philippe-Chatrier)에 새겨진 슬로건은 ‘La victoire appartient au plus opiniâtre.’, 즉 ‘승리는 가장 끈질긴 자의 것이다’이다.

전 세계의 시청자들을 위해 ‘Victory belongs to the most tenacious’라고 영어로도 번역해 반대쪽에 게시하고 있다.

롤랑 가로스는 어디서 온 이름인가
이는 나폴레옹이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이 대회의 별칭이자 경기장 이름의 주인공인 롤랑 가로스(Roland Garros)가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다. 심지어 자신의 비행기 프로펠러에 새겨 넣기까지 했던 말이다.

롤랑 가로스는 천재 비행사로, 지중해를 최초로 횡단하는 등 많은 비행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많은 무공을 세웠는데, 독일군에 체포되어 3년 여간 옥고를 치루다가 독일군 장교로 변장해 탈출에 성공했다. 옥고를 치루면서 건강이 악화됐고 이후 근시도 왔지만, 비밀리에 안경을 제작해 씀으로써 어떻게 하든 조종사 자격을 유지하려 애썼다.
당시 클레망소(Clémenceau) 프랑스 총리는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자 출격을 강하게 만류했는데,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다시 출격했고 1918년 10월 비행기 피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그의 용기와 투지를 기려 프랑스 오픈 경기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원래 스타디움을 레이싱 클럽과 프랑스 테니스 클럽이 같이 사용했었는데 1928년 레이싱 클럽 측이 클럽의 회원이었던 롤랑 가로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스타디움에 붙이라는 조건으로 프랑스 테니스협회에게 스타디움을 넘긴 것이다.
이처럼 롤랑 가로스(Roland Garros)라는 이름은 테니스 코트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거리가 먼 하늘에서 온 것이다.
이미 12세때 폐렴을 앓았던 롤랑 가로스는 꾸준히 자전거를 타며 호흡능력을 회복했고, 이를 극복한 이후에도 닥쳐온 수많은 고난들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이겨내면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던 의지의 비행사였다. 프랑스 테니스 협회는 롤랑 가로스의 이 같은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좌우명을 스타디움에 새겨 넣었다.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 롤랑 가로스의 정신
그런데 이 슬로건은 프랑스 오픈의 코트의 특성, 즉 클레이(clay, 흙)라는 특성과 맞물리면서 실제로 그 우승자들의 면모에도 정확히 반영되어 왔다. 클레이 코트는 잔디 코트(윔블던 대회)나 하드 코트(US 오픈, 호주 오픈 대회)에 비해 지면에 바운드된 후 공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 그래서 상대의 강타를 받아낼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어서 끈질기게 공을 받아내는 선수에게 좀 더 유리하다. 끈기, 굴하지 않는 도전의 정신인 롤랑 가로스의 정신과 상당히 닮아 있다. 과연 비외른 보리, 마이클 창, 그리고 라파엘 나달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기술과 파워보다는 끈질긴 투지를 앞세운 선수들이 타이틀을 거머쥐어 왔다.

이번 대회에서는 이러한 정신에 더해, 특히 부상을 극복해 내는 엄청난 투혼이 나달의 신기록 수립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더욱 돋보인다. 즉, 나달은 자신의 평소 플레이 스타일도 그렇지만 이번에는 여기에 놀라운 투혼을 보여준 것이 더욱 그를 빛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투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달'은 어디서 온 이름일까
그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팬들의 엄청난 지지에 대한 보은의 정신에서 오는 것이리라. 사실 스페인에서 그는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
다만 여기서 그가 발레아레스 제도(Balearic islands)의 마요르카 섬(Mallorca)에서 태어난 카탈로니아 사람이라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카탈로니아(Catalonia)는 잘 알려져 있듯이,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는 민족이다. 그들은 자주 의식이 매우 강하다. 심지어 자신을 스페인인이 아니라 카탈로니아인이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스페인 국민들 내에서의 지지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이지만, 나달은 그런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는 카탈로니아를 스페인에 잔류하는 것을 지지하는 통합파에 속한다. 그는 예전에 "스페인 없는 카탈로니아도, 카탈로니아 없는 스페인도 모두 의미가 없다"고 역설한 바가 있다.
그의 성(姓) Nadal(나달)은 카탈로니아 말로 ‘탄생’을 뜻한다. ‘탄생의’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natalis(나탈리스)에서 온 말이다. 이는 프랑스어에 natal이라는 형용사를 파생시켰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의 여성 이름 Natalie(나탈리)와 Natalia(나탈리아)도 파생시켰다. 프랑스 단어 naïf(남성형), naive(여성형)는 ‘갓 태어난’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이것이 영어에 들어가 naive(나이브)를 파생시켰다. 이는 ‘(경험·지식 부족 등으로) 순진해 빠진, (모자랄 정도로) 순진한’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진하다는 뜻이다.
역시 동일한 어원의 ‘…태생의, 출신의’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natif(남성형), native(여성형)도 영어로 들어가 native(네이티브)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흔히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라고 할 때의 그 단어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renaissance(르네상스)도 ‘(그리스 문화의) 재탄생’을 뜻하는데 여기서 ‘다시, 재(再)’를 뜻하는 ‘re-’(르)를 제외한 naissance(네상스)도 ‘탄생’을 뜻하는 프랑스어로서 nadal과 동일한 어원의 단어다.
그렇다면 사람 이름에 왜 ‘탄생’이라는 의미의 명칭이 존재하는 것일까? 여기서 ‘탄생’은 ‘예수의 탄생’을 가리킨다. 성탄절을 이탈리아어로 ‘Natale’(나탈레), 스페인어로 ‘Navidad’(나비닷), 프랑스어로 ‘Noël’(노엘)이라고 하는데, 이들 어휘 모두 예수의 탄생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즐거운 성탄’, 영어로 Merry Christmas를 이탈리아말로 Buon Natale(부온 나탈레), 스페인어로 Feliz Navidad(펠리츠 나비닷), 프랑스어로 Joyeux Noël(주아외 노엘)이라고 한다.
요컨대 Nadal(나달)은 예수의 탄생을 뜻하는 말이어서, 구세주, 메시아를 뜻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Messi(메시)도 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구세주인 나달이 카탈로니아의 스페인 내 통합 유지를 원한 것은 자신이 카탈로니아의 구세주가 아니라 스페인의 구세주가 되기를 원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테니스의 기원은 어디서?
프랑스 오픈의 또 하나의 특성은 경기에서 서브의 강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대회에 비해 작다는 것이다. 다른 대회에서는 수많은 에이스(Ace)가 터져 좋게 보면 시원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서브 한 방으로 포인트를 가져가는 장면이 많이 연출돼 허탈하고 허전한 기분을 주는 측면이 많이 있다. 반면에 프랑스 오픈에서는 서브 에이스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길고 아기자기한 랠리를 더욱 많이 볼 수 있어 테니스 시청을 즐기기 좋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앞에서 밝힌 바대로 코트의 표면이 흙이라는 점에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본래 테니스의 모습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본래 테니스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테니스 매니아라면 이 운동이 프랑스 궁정의 ‘죄드폼’(jeu de paume)에서 기원했다는 것쯤은 안다. ‘손바닥 게임’이라는 뜻의 이 말에서 ‘폼’(paume)은 영어에 들어가 ‘팜’(palm)이 되었는데, 이는 ‘손바닥’이라는 뜻이다. 공을 손바닥으로 쳐서 상대편에 보내던 게임을 영국인이 보고 돌아가서 더욱 체계적인 스포츠로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테니스(tennis)다. 그러면 어쩌다 ‘죄드폼’의 이름이 ‘테니스’가 된 것일까?
14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이 경기를 할 때 사람들이 ‘Tenez !’(테네즈)라고 하면서 경기를 시작했는데, 이는 “자, 받아요!”라는 뜻이다. 영국인이 이를 듣고 그 경기 이름을 tennis(테니스)라고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테네즈’에서 영어의 ‘테니스’(tennis)가 됐으니, 결국 ‘테니스’는 ‘자, 받아요’에서 기원한 것이다. 1789년 6월 20일에 있었던 프랑스 혁명의 전조가 된 사건인 ‘테니스 코트의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이 바로 이 죄드폼 경기를 하던 코트에서 평민 대표들이 헌법 제정을 결의한 사건을 가리킨다. 테니스 코트는 이렇게 인류사를 바꾼 중요한 사건의 장소였다.
당시에는 마지막 z를 발음해 ‘테네즈’였지만 이후 이 발음이 탈락해 현대 프랑스어에서는 ‘트네’라고 발음한다. 이 ‘Tenez’는 현대 프랑스어에서 상대에게 어떤 물건을 주면서 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자, 여기요/ 여기 있어요’라는 뜻이다.
승리는 가장 끈질긴 자의 몫
그런데 요즘 프로 테니스를 보면 플레이를 시작하기 위해 서브를 넣을 때 과거처럼 ‘자 받아요.’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지 말아요’라고 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프로 테니스 경기의 서브는 상대 선수가 잘 받지 못하도록 각도 깊은 곳에 강하게 꽂아 넣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테니스가 시작되던 당시에는 프랑스 궁정에서 사교 목적의 경기였던 것이 이제는 승부를 가리기 위한 경쟁 목적의 경기가 된 것이다. 놀이가 승부가 된 셈이다.
요컨대 테니스는 프랑스에서 배려의 사교 경기로 출발했지만, 영국으로 건너가 경쟁의 스포츠가 된 것이다. 그리고 프로 스포츠가 되면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선수들은 더욱 더 화려한 기술과 파워를 가져야만 했다. 그런데 경기에서 이기려면 기술과 힘 이외에도 끈질긴 투지를 가져야 하는데, 특히 프랑스 오픈은 나폴레옹에서 롤랑 가로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서 바로 이 투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투지의 상징인 롤랑 가로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프랑스 오픈의 코트 표면인 클레이 코트, 정확히 말하면 앙투카(en-tous-cas) 코트가 요구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가 중첩돼 프랑스 오픈의 특성을 구성하게 됐다.
프랑스 오픈은 요구한다. 승리는 가장 끈질긴 자의 것이라고. 아마 우리의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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