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최보식
신세계그룹 계열 스타벅스코리아가 진행한 텀블러 프로모션 이벤트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5월 18일 '탱크 데이'라는 명칭과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를 담은 텀블러 마케팅은 순식간에 온라인 공간을 격렬한 분노로 가득 채웠다.
미국에서 대용량 텀블러를 '물탱크(Water Tank)'에 비유하는 상업적 관행에서 비롯된 해프닝은 거대한 여론의 해일 앞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문제는 그러한 상업적 맥락이 한국 사회가 지닌 역사적 기억과 충돌했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깊은 상흔이자 트라우마를 연상시키는 불쾌하고 부적절한 도발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러한 정서적 민감성을 간과한 채 마케팅을 감행한 것은 명백한 부주의였고, 대중이 이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에서 불쾌감을 표출하고 비판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사태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드러났다. 문명사회의 대원칙인 '법치'와 '절차' 대신, 집단적인 단죄와 최고 권력의 '초법적 개입'이 전면에 나섰다.
어떤 사안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가동되어야 할 합리적인 메커니즘이 있다. 마케팅의 기획과 내부 검수 과정에 대한 사실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고, 악의적 의도가 있었는지 혹은 단순한 행정적 태만이었는지 인과관계를 따진 뒤, 그 책임의 무게에 따라 합당한 문책과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SNS상에서는 그러한 이성적 여과 과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앞서 언급한 절차적 메커니즘 자체가 작동할 기회를 잃었다. 이미 특정 프레임에 기반한 도덕적 낙인찍기와 여론몰이가 시스템의 자리를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온라인 과열 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본래 안고 있던 오래된 위험과도 맞닿아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일찍이 민주주의 사회가 직면할 가장 무서운 형벌로 '다수의 전제'를 꼽은 바 있다. 합리적인 절차나 정교한 토론이 사라진 자리를 집단의 압도적인 감정과 여론의 압박이 채울 때, 민주주의는 법을 초월하여 소수를 짓밟는 다수의 독재로 변질된다는 경고다.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수의 압력은 단지 정치적 현상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집단적 감정이 군중 심리와 결합하는 순간 더욱 강한 사회적 에너지로 증폭된다.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군중과 권력》에서 하나의 표적을 설정해 끝까지 추적하고 사냥할 때 완벽한 일체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집단의 심리를 '사냥 군중(Hunting Pack)'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SNS라는 가상 광장에 모인 대중은 대기업과 총수라는 명확한 타깃을 설정한 채 집단적인 분노의 에너지를 한곳으로 방출했다. 사실관계나 인과관계를 따지는 문명화된 절차들은 이 거대한 디지털 사냥의 흐름 속에서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급기야 분노는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파괴 행동의 형태로 표출됐다. SNS 상에는 스타벅스 카드를 가위로 자르고, 머그컵을 깨뜨려 그 파편을 전시하며, 텀블러를 망치로 부수는 자극적인 이미지와 영상들이 경쟁적으로 업로드되었다. 이는 "소비하지 않겠다"는 합리적인 불매운동의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인 증오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파괴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심리에 있다. 이러한 파괴를 일삼는 군중은 스스로를 '정의의 심판자'로 굳게 믿고 있다. 신념이 이성을 압도하고 "우리는 정의롭다"는 착각이 집단에 주입되는 순간, 인간은 타인을 향한 유무형의 폭력에 도덕적 면죄부를 발행한다. 법적 절차와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약속은 망각된 채 말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집단적 감정이 광장 내부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집단적 감정은 국가 권력의 개입과 결합하며 사태 자체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격앙된 SNS 저격은 파국의 결정적 뇌관이 됐다. 그는 엑스(X) 계정을 통해 공식적인 조사나 사법적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민간 기업을 향해 "저질 장사치", "비인간적 막장 행태"라는 극단적인 언사를 퍼부으며 "법적·정치적 책임"을 운운했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낙인찍기는 스타벅스에 머물지 않고 과거의 유사 사례들까지 소급되는 양상으로 확장됐다. 이 대통령은 급기야 7년 전 이미 종결되고 사과로 마무리된 2019년 무신사 광고까지 다시 끌어올려 "여러분도 확인해 달라,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느냐"며 가상 광장의 대중에게 새로운 마녀사냥의 불씨를 직접 던져주었다. 최고 통치권자가 법적 절차와 이성적 제도 대신, 타사의 과거 실수까지 들추어내 군중에게 제공함으로써 분노를 지속적으로 조직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가 말한 위험한 '결단주의' 정치의 단면을 연상시킨다. 제도 및 법적 절차를 우회하여, 최고 통치자가 직접 광장의 언어로 '우리 편(동지)'과 '처단해야 할 대상(적)'을 명확히 나누어 심판하는 방식이다. 사법 질서의 최종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이 확성기를 들고 광장의 인민재판에 판사로 가세한 순간, 국가의 공적 시스템은 그 자리에서 마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거대한 권력의 포화 앞에서 자본은 문명사회의 절차마저 스스로 팽개쳤다. 신세계 정용진 회장은 사건 발생 당일 스타벅스코리아 운영사 SCK컴퍼니 손정현 대표이사를 즉각 해임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리고 공식 사과문을 통해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이며 그룹 전체의 역사 인식과 감수성이 부족했다"며 완전히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이미 임직원 전원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했으며 "이번 사태의 발생 경위와 승인 절차를 철저히 조사하고 결과를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사과문은 이번 잔혹극이 도달한 절차적 파산을 상징한다. 책임 규명이 처벌보다 앞서야 한다는 최소한의 순서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문명사회라면 사태의 '경위 조사'가 선행되고 그 결과에 따라 '문책과 징계'가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이성적 순리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전방위적 압박과 광장의 여론으로 인해 사실관계가 규명되기도 전에 전문경영인이 해고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문경영인의 경질은 경영상의 중대한 배임이나 법적 과실이 입증되었을 때 이사회를 거쳐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처벌을 먼저 집행해 놓고 조사는 나중에 하겠다는 이 거꾸로 뒤집힌 절차는 자본주의의 자율성과 사기업의 법적 시스템마저 초법적 폭력 앞에 무력화됐음을 보여준다.
사태가 정상적인 시장 기능마저 마비시키는 단계에 이르자, 스타벅스코리아는 사내 내부망을 통해 매년 여름 매출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던 핵심 연례 행사인 '여름 프리퀀시 프로모션'을 포함한 모든 서머 마케팅 일정을 전면 연기한다고 공지했다.
나아가 논란의 발단이 된 탱크 텀블러는 전 매장의 판매 진열대에서 배제됐다. 소비자의 자율적 선택과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해야 할 기업의 경영 활동이 권력의 압박과 군중의 폭력 앞에 얼어붙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마케팅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사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문명사회가 가진 최소한의 갈등 봉합 메커니즘마저 작동을 멈추기 시작했다. 신세계그룹이 김수완 부사장을 광주 5·18 기념문화센터로 보내 사죄하고자 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고, 고발 단체는 그 사과를 '사후약방문'이라 폄훼했다. 잘못에 대해 합리적 절차에 따라 책임을 묻고 사과를 수용하는 대신, 타깃으로 낙인찍힌 대상을 끝까지 법의 제단에 올려 파멸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용서 없는 상호 파멸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결국 이성적 법리를 삼켜버린 사법주의적 무리수가 잇따랐다. 한 시민단체는 정용진 회장과 전 대표를 모욕 및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형사 고발했다. 대중의 정서적 격앙에 맞춰 공권력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법치주의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마저 군중의 심판 아래 굴복시키려는 위험한 시도다.
급기야 비극의 상징적 주체이자 당사자인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들까지 직접 법적 처벌을 호소하며 고발 대열에 합류했다. 유공자들은 광주 남부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스타벅스와 정 회장을 '5·18 특별법(역사왜곡처벌법)' 위반 및 모욕 혐의로 고발했다. 단순한 업무상 실수가 아닌 악의적 왜곡이라는 프레임 아래 사법당국의 엄정한 처벌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역사적 참상의 트라우마를 지닌 당사자들의 법적 대처는 이 사태를 형사 처벌의 영역으로 고착시켰다.
이러한 무차별적 고발 행위는 민주주의의 법치 정신과 거리가 멀다. 과거 역사 속의 마녀사냥이나 전쟁터에서 적국의 상징을 찢어발기며 승리감에 도취하던 인간의 원초적 지배욕과 파괴 충동이 디지털 기술의 옷을 입고 부활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인과 학계 역시 이 인민재판에 학문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사법주의적 폭주에 가세했다. 김상욱, 백승종, 박노자 등은 이번 사태를 대기업의 '반사회적 사상 주입'이나 '역사 모독'으로 규정하며 포화를 퍼부었다. 심지어 김상욱은 연쇄살인마의 ‘식칼데이'라는 자극적이고 부적절한 프레임까지 동원했다. 특히 사법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백승종의 주장은 대중의 분노를 이성으로 잠재우기는커녕 권력의 검찰권 동원에 학문적 면죄부를 발행해 준 것과 다름없다. 도덕적 우월감에 취한 지식인들로 인해 사회는 이성적 대화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집단적 단죄의 영향은 법적 영역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논리는 점차 사회적 관계와 일상의 영역으로 침투하기 시작한다. 우려스러운 것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의 칼날이 결국 평범한 시민들의 삶과 소비 행위의 지나친 정치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징후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상적인 선택마저 정치적 이념의 시험대로 삼는 사회적 경직성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킨다. "이 시국에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자는 반민주주의자"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작동하는 순간, 광장의 분노는 거대 기업을 넘어 내 옆자리의 동료와 이웃을 정조준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될 경우 분노의 표적은 점차 일상으로 확장된다. 이것이 바로 집단적 광기가 초래하는 가장 비극적인 단계인 '적의 일상화'다. 도덕적 우월감에 취한 군중은 일상 속에서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감시하고 비난한다.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누구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할 일상이 파괴되고,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눈치 보는 상호 감시 사회가 도래하는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동료 시민의 일상을 검열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에 불과하다.
이 감시와 검열의 서막은 언론의 가학적인 '일상 훔쳐보기'를 통해 섬뜩한 실체로 구체화되었다. 광주 전남 지역 언론 《전남매일》은 시내 스타벅스 매장들을 직접 찾아가 시민들의 모습을 관찰한 뒤, "’오월 조롱’에도 매장은 북적, 민주성지 자존심은 어디로?"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그들을 정죄했다.
커피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상적 풍경을 두고 “공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철저히 단절된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이라 낙인찍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소비행위마저 '죄악'이자 '기억의 배신'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광장의 분노에 힘입어 언론이 앞장서서 감시와 검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정죄는 보다 교묘하고 세련된 '내면적 검열'로 진화한다. 5·18 기념재단 관계자는 인터뷰를 통해 "소비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역사의 비극을 가볍게 여긴 기업 앞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머무는 것은 그날의 숭고한 가치를 쉽게 넘겨버리는 일"이라며 시민들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주입했다. "잠시나마 커피 한 잔의 일상보다 더 소중한 역사의 무게를 깊이 헤아려달라"며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시민을 '의식이 결여된 반역자'로 조용히 파문했다.
일상의 위축은 문화계 전반의 ‘자기검열’로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 이번 주 개최를 앞둔 ‘서울 재즈 페스티벌’ 측은 사태의 불똥이 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뚜렷한 유권해석이나 사유도 명시하지 않은 채 스타벅스 브랜드 부스 운영을 전격 취소했다. 군중의 눈 밖에 난 상징물이 비정치적 축제 공간에서마저 퇴출당하는 풍경은 광장의 폭력이 여가와 자유를 얼마나 위축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들은 단순히 개별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된 작동 방식 아래 연결되어 있다. 즉, 한국형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취소 문화)’의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서구에서 캔슬 컬처는 대상을 도덕적으로 매장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병폐로 지적받는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어디까지나 민간 여론 광장에서 벌어지는 평판 전쟁에 머문다면, 한국판 캔슬 컬처는 차원이 다르다. 광장의 분노를 정치인들이 당파적 무기로 가공하고, 고위 관료들이 초법적인 처벌 시그널을 보내며 민간 영역을 압박하는 ‘권력 결탁형 전체주의’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인들은 도리어 이 마녀사냥의 확성기를 자처했다. 진보당 손솔 의원은 스타벅스 카드를 가위로 자르는 자극적인 영상을 배포했고, 거대 제1야당의 복기왕 의원 역시 의원실 앞에서 일회용 컵을 내팽개치며 "우리 방엔 못 들어온다"고 외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헌법기관들이 앞장서서 특정 브랜드를 '공적 공간에서 배제되어야 할 절대악'으로 낙인찍고 물리적 폭력성을 정당화한 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여당마저 선거 캠프에 스타벅스 출입 자제령을 내리며 일상을 진영 싸움의 최전선으로 변질시켰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법리적 검토도 없이 "무관용 원칙"을 천명하며 사법적 칼날을 치켜들었다. 한 나라의 법치 체계를 수호해야 할 수장이 광장의 흥분에 편승해 공권력의 무차별적 집행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이는 현대적 의미의 '국가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적 엄숙주의는 마침내 공교육 영역까지 확대됐다. 광주·전남 교육청은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등과 연대하여 '역사왜곡 논란 기업에 대한 공동 대응 지침' 마련에 착수하고 협력 사업에서 스타벅스를 전면 배제하기로 했다. 공교육 기관이 합리적 절차 대신 군중의 낙인찍기를 수용하여 미래 세대에게 '집단적 청산'을 정의의 이름으로 교육하겠다는 국가주의적 위험성을 드러낸 것이다.
광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분노의 화살은 결국 '인물 개인에 대한 도덕적 매장'과 '사상 검증'이라는 최종 종착지를 향해 폭주했다. 고(故) 박종철 열사의 친형 박종부 씨와 학계 원로들은 사태의 배후로 정 회장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정조준하며 "정 회장 본인부터 스스로 잘라야 한다"며 경영권 박탈과 완벽한 인적 청산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캔슬 컬처의 가장 파괴적인 속성인 '용서 없는 배제'가 현실화된 징후다. 문명사회라면 사과와 재발 방지책이라는 절차를 통해 갈등을 수습하는 메커니즘이 가동되어야 하지만, 도덕적 무결성에 도취한 군중과 이해당사자들은 타깃으로 설정된 인물의 완벽한 사회적 파문 전까지는 그 어떤 제도적 보완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가학성을 날것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이 사상 검증의 단두대 앞에서 개인이 쌓아 올린 자율성과 법적 권리는 완전히 질식당한다.
스타벅스의 부주의한 마케팅에 분노할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장경제에서 소비자가 기업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실 규명 없는 마녀사냥, 대통령의 초법적 낙인찍기, 그리고 이에 겁먹은 기업 총수의 굴복으로 이어지는 이번 잔혹극의 과정은 결코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니다. 이성적 절차와 법치가 감정과 권력에 의해 통째로 압도당할 때, 사회는 얼마나 쉽게 야만의 시대로 회귀할 수 있는가.
이처럼 감정적 결속이 제도적 질서를 압도하는 순간에 대해 정치철학은 오래전부터 반복해서 경고해 왔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제도와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건강한 '시민(Citizen)'과 달리, 오직 눈앞의 적을 파괴하기 위해 감정적으로 결탁하는 맹목적인 집단을 '폭민(Mob)'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아렌트의 경고처럼, 합리적인 사회적 시스템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권력과 결탁한 감정적 폭민정치(Mobocracy)가 채울 때, 자유민주주의는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기업의 부주의나 대중의 과잉 반응만을 드러낸 사건이 아니었다. 절차와 제도뿐 아니라 시민적 관용, 공적 권위, 그리고 일상의 자유까지 동시에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스타벅스 텀블러 마케팅에서 촉발된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비극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방어선이 생각보다 훨씬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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